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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준만 교수(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따라해보기 _02 (압축성장)
    WrItInG/ReLiGiOn 2014. 10. 20. 17:40

     한국개신교회의 압축성장

     

    불교가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재위 371~384) 2년인 372년 전진(前秦: 315~394)의 왕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어 불상과 불경이 전해진 것을 시작으로 한다. 2년 후 374년에 사찰이 세워진다. 
    백제는 침류왕(枕流王) 1년(384)에 (東晋: 317~420)으로부터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왔는데 이듬해 사찰이 세워진다. 
    신라의 불교 전래는 여러 설이 있으나, 이차돈(503~527)의 순교로 법흥왕 14년(527)에 국가적으로 공인되었다. 
    삼국시대 이후 고려까지 융성하던 불교는 조선 세종 30년(1448) 경복궁 안에 세운 내불당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억불숭유정책의 핍박을 받았다. 

    불교의 시작은 공식적인 기록 이전에 사회에서 이미 받아들여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전래 직후 사찰을 짓고 승려를 양성하는 등의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천주교는 그러한 과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1631년 정두원이 명나라에서 서양의 문물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가져왔고,
    마테오 리치 신부가 북경에서 발행(1603)한 <천주실의>가 종교가 아닌 '서학(西學)'으로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불교와는 달리 천주교의 시작은 환영이 아닌 박해였다. 
    명례방 사건(1785), 신해박해(정조 15년, 1791), 신유박해(순조 1년, 1801), 기해박해(헌종 5년, 1839) 등으로 계속 되다가 흥선대원군의 병인박해(고종 3년, 1866~1868)에 절정을 이룬다. 이는 본의 아니게 정교분리에 익숙해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장 때문으로, 당시 교인수 약23,000명, 프랑스 선교사 12명으로 추측되는 천주교회 교세 중 약 8,000명의 신도와 9명의 선교사가 처형되었다. 약 30년이 지난 이후 1895년,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 일부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지면서 신앙의 자유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곧 우리나라의 굴곡많은 역사에 휘말리고 만다. 

    개신교의 역사는 또 다른 형국이다. 
    외국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선교가 불가능했던 시기에, 1879년 이응찬(李應贊), 서상륜(徐相崙, 1848년~1926년) 등이 중국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다음 신앙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곧바로  성서 번역에 착수하여 1882년 함경도 방언으로 된 <예수성교 누가복음젼셔>를 출판했다.
    곧이어 1885년 4월 5일 같은 날 장로교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와 미국 북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가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그 이후 1907년 평양대부흥 사건을 통해 폭발적인 교세 확장이 시작된다. 하지만 곧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은 모두에게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독립운동과 정교분리 원칙에 따른 무관심, 그리고 적극적인 친일행각은 어느 한 종교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회는 미국 및 다시 서양 열강들의 종교로서, 을사늑약(일본의 한국보호조치)을 시인해준 워싱턴의 눈치를 봐야하는 일본에게 있어서 손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또한 서양 선교사들의 입장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광복 이후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응이나, 그에 따라 북에서 피난 온 모든 종교들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회는 미국의 원조를 독점하는 형태로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리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한국개신교회의 극적인 양적성장은 한 종교의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압축성장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 교부인 터툴리안(Tertulian, 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약 155년~약 230년)의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 '박해는 그리스도인의 무죄를 변증한다'라는 문장을 인용하면서 한국개신교회의 양적성장과 해외선교를 변증하는 것은 사실 천주교에 더 알맞는 말이다. 

    문정관들의 퇴각 명령에 따르지 않고 대동강을 통해 평양성으로 강행하던 미국 상선인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호를 통역 자격으로 타고 온 토마스 목사는 한국 초기 선교 역사에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개신교 성직자 순교자(1866)로 주장해야 할만큼의 한국개신교회의 순교자들의 피에 대한 논리는 미약하다. 

    6,70년대의 유교적 제사의 거부로 인한 전통 가정의 파괴의 대명사로 한국개신교회가 박해(?)를 받은 것 또한 천주교의 박해에 비하면 문화적 충격 정도의 성격일 뿐이다. 

    굳이 2천년 전의 초기 교회의 박해 상황과 비교하지 않더라고, 2백년 전의 천주교의 박해상황과 비교해도 한국개신교회의 박해상황은 단지 신앙과 진리를 지키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특수한 어려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그래서 현재 한국사회가 한국개신교회를 비판하고 폄하하는 것을 종교박해라고 말하는 것은 아전인수격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막스베버의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강조한 청교도적 금욕주의가 한국사회의 압축성장과 더불어 성장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의 한국개신교회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 
    이 또한 한국의 경제적, 정치적 압축성장의 원인이 단순하지 않은 것과 같다. 

    문제는 한국의 압축성장으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을 한국개신교회 또한 극복하지 못한 데 있다. 

    강준만 교수는 압축성장 이면에 있는 위험감수 문화를 지적하는데, 이는 법적,도덕적 위험까지 감수하는 걸 포함하고 있으며, 이면에는 사회적 책무(Noblesse Oblige)가 없은 천민 엘리트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한국개신교회의 엘리트, 즉 목사, 장로 등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교인수를 늘리고, 교회건물은 크게 짓고, 교육관과 수련원을 마련하고, 교회행사를 규모있게 하는 것에만 집중할 뿐, 
    이것만 달성된다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 신학적이고 사회적인 문제, 그리고 양심의 문제는 사라지고 만다. 
    그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리사욕, 인기(명예?), 그것의 독점 및 세습까지, 그리고 이를 위한 부정부패, 기만, 이간질, 폭력 등 일반사회에서 비판 받는 것에도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만다. 
     
    물론 이는 그것을 어떤 이유에서든지 용인하는 개신교인에게도 동일하다. 

    교회의 양적성장을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도덕적 위험까지 감수하는 것은 결국 한국개신교회의 침몰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개신교인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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