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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강 10 _조정래
    독서 2010. 2. 23. 11:19

    지은이 : 조정래
    펴낸이 : 해냄출판사

    조정래 대하소설 10
    제3부 불신시대

     

    43. 블랙리스트 <2>  (안경자, 미자, 복실)

    44. 먹구름  (강기수, 강길천, 강숙자, 송동주 / 농촌경제파탄)

    45. 피신하라  (유일민, 임채옥, 유일민, 이용진, 서경혜)

    46. 피땀으로 뭉친 돈  (문태복 / 담석증)

    47. 싱거운 친구  (이상재, 서경혜, 허진, 김진택)

    48. 붉은 모래언덕  (박영자, 원병균, 박준서)

    49. 고생의 뒤끝  (나윤자, 갈포댁, 나복남, 전묘숙)

    50. 보이지 않는 손들  (이경열, 서경혜, 이상재, 배상집)

    51. 홀로 푸르른 나무  (한인곤, 임종국, 이상재 / 친일문학론, 남조선민족해방전선)

    52. 동행에 심은 뜻  (유일표, 운영 / 박정희 대통령 피살)

    53. 제 발등 찍기  (양용석, 한정임)

    54. 업어치기  (박준서, 박부길)

    55. 한낮의 어둠  (이상재, 유일표, 이용진, 유일민, 서경혜, 임채옥, 허미경 / 계엄사 출판검열부)

    56. 운명적 좌절  (강숙자, 안경자, 홍석주, 이규백, 김선오, 노화자, 노성칠)

    57. 광주를 향하여  (전준일, 이상재, 유일표, 이용진, 복실이, 미자, 김명숙, 박보금, 원병균 / 계엄포고 10호)

     

    Prometheus Bound (Jacob Jordaens, 1640)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의 이름이 가지는 뜻은 '먼저 생각하는 자'이다. 생각을 먼저하고 행동한다는 뜻이다. 인간에게 불을 준 것은 그의 사려깊은 고민 끝의 결과이다. 그래서 그는 헤라클레스(Hercules)가 구해주기 전까지 3년이란 세월 동안 매일의 고통을 참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반면 제우스의 꾀임에 빠져 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판도라를 아내로 삼아 인간의 모든 불행이 담긴 상자를 열도록 한, 동생 에피메테우스(Epimetheus)는 '나중에 생각하는 자'이다. 행동하고 일을 저지른 후에야 생각을 하게 되는 자이다.

     

    '신화(神話, myth)'란 단순히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쉬운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인류의 고대 문학작품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검증되어온 '이야기'의 저력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만들어진 순서를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자.

    먼저 인간은 불을 사용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불이라는 것은 다른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중요한 것 중 하나였고, 지금도 그렇다.

    사회적 동물? 계급이나 직무를 나누고 집단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들이나 곤충들도 있다. 언어적 인간? 간단하지만 언어를 가지며, 통역까지 있는 돌고래도 있다. 도구적 인간? 미리 예측하고 계산할 수 있는 영장류도 있지만, 까마귀도 있다. 정도의 차이가 분명히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 고유의 특성이라고는 할 수 없다.

    종교적 인간이라고 한다면 아직은 유효할 수 있다. 하여튼 불도 아직까지는 인간외의 다른 동물이 인위적으로 이용하지 못한다.

     

    물론 '불'을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 중 하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불'은 인간이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는 단순한 도구는 아니다. 문자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불은 자연의 힘으로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다만 이용할 뿐이다.

     

    그렇게 불은 자연 현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게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 주는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그냥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불이라는 것이 주어졌는지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불'이 가지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번개가 내려칠 때 우연히 발화했거나, 바람의 힘에 서로 마찰이 생겨 나무 가지에 불이 붙는다거나, 우연히 발견한 부싯돌이 서로 부딪히면서 불꽃이 이는 것을 알고는 있었겠지만, 단순히 경험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이러한 과학적인 설명으로는 인간에게 불이 가지는 의미를 전혀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둠을 이기는 힘, 추위를 물리치는 힘, 짐승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음식을 익히는 힘, 광석에서 구리, 철을 빼내는 힘, 그것으로 기구나 무기를 만들수 있게 하는 힘도 있다. 이러한 에너지의 기본이 되는 힘인 불을 손아귀에 쥔 인류는 미래를 미리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인간은 불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누가? 먼저 생각하는 자인 프로메테우스가 (불의 활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더 빛을 발하니까)

    언제? 각 생물들에게 각각의 재능과 능력을 줄 때 (인간만의 고유한 재능과 능력이라는 것을 말해야 하니까)

    어디서? 최고의 신인 제우스로 부터 (인간이 이용하는 자연의 힘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 중 하나니까)

    어떻게? 몰래 훔쳐서 (불이 인간에게 신과 대등할 정도의 지위를 부여하니까)

    왜? 자신의 고통을 미리 생각했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위해서 (달리 설명할 수 있겠는가?)

    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는 본성적으로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현재를 결과로 보고 과거의 원인과 기원을 찾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인과론적인 논리가 적용되는 것도 필연적이다. 그러니 6하 원칙에 따라 일일이 모두 나름대로의 설명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떤 것 하나를 제외하고 설명을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설명하지 못하면 그것은 인간이 만족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고, 인간은 계속 설명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렇게 신화는 내적으로 논리적으로 완성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부연 설명을 하기 위한 또 다른 이야기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신화의 힘은 인과론적인 논리가 가지는 힘에서부터 시작된다.

    원인 A가 있고, 결과 B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누구나 일반적으로 A가 있었기 때문에 B가 있었다라고 생각한다. 즉 B는 A의 필연적이거나 사실적인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A가 된다. 왜냐하면 A라는 원인을 알고 이해한다면, B라는 결과는 인과론적으로 필연적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인간에게는 B가 '먼저' 있었다. A는 B를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이 '뒤'에 찾은 그럴듯한 이유이다. 하지만 인과론적 논리로는 A가 먼저이고, B가 나중이다. A가 있었기 때문에, 비로서 B가 생길 수 있었다.

    이렇게 신화는 현실보다 오래된 '먼저'가 되고, 더욱 중요한 것이 되고, 신적인 신성한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신화화(神話化)'의 과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화는 현대에서도, 바로 지금도 유효하다.

    인간은 여전히 인과론적인 논리를 생각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의 예로 1차 세계 대전을 격렬하게 치룬 프랑스의 여성들 중에서 전쟁터에서 간호사로 자원했던 여성(수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쟁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남자 군인들이다. 아무 것도 없는 열악한 야전에서, 힘들고 배고픈 행군을 하며,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바로 옆의 전우의 죽음의 비명과 고통을 붉은 피와 함께 떨어내며, 가족과 나라를 위해 서로를 죽이고 죽는 전투를 한 사람들은 모두 남자 군인들이다. 이것은 상식처럼 자연스럽게 우리의 이성을 만족시킨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프랑스 자원 간호사들은 남자 군인들과 똑같이 열악한 야전에서, 힘들고 배고푼 행군을 함께 하며, 적군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바로 옆의 동료와 같은 동포이자 전우인 부상 군인들의 죽음의 고통과 부상의 신음을 더욱 처절하게 듣고 느끼면서,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서로를 죽이고 죽는 전투를 한 것은 남자 군인들만의 것이라고 항변하겠지만, 1차 세계 대전 때에도 여성 군인으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고, 그들은 전투의 최전선에 참여했었다.

     

    다만 전쟁이 끝나고 전쟁은 남성 영웅들의 신화가 되었고, 여성은 수동적이고, 보조적이며, 순결하고, 아름다워, 어두운 전쟁을 밝히는, 즉 전쟁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여성 영웅들의 신화가 만들어졌다. 신문, 잡지, 소설, 자서전, 연극, 영화, 그림, 음악과 같은 문화적 매체들 뿐만 아니라, 정치가들의 연설, 학교의 교육, 집안 어른들의 이야기 모두가, 사회 주류의 대부분이 이러한 남성들의 전쟁 신화화에 동조하였다. 참전했던 소수의 여성들마저도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자신이 겪은 다른 사실들에 대한 기억을 하지 못하고, 그러한 신화에 동화되어 가고 말았다.

     

    Fragment of Panorama 'Defense of Sevastopol in 1854-1855' during the Crimean War 1853 - 1856 : 그림 중앙의 왼쪽 부분에 보면 부상자를 치료하고 있는 나이팅게일이 보인다.

     

    프랑스의 자원 간호사들의 활동에 자극을 받아 크림전쟁의 야전병원으로 뛰어들어간 영국 간호사 '나이팅게일'도 역시 헌신적이고 순결한 간호사 개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녀의 역량은 전쟁 중에는 영국군 야전병원 간호총감독이 되었고, 전쟁 후에는 그
    경험을 토대로 영국에서 군대보건을 위한 왕립위원회를 설립하고, 인도에 파견된 영국군을 위한 논문을 발표해서 인도 총독부 산하에 위생국이 설립되도록 영향을 미쳤고, 세계 최초의 간호학교인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도 설립했다. 하지만 이러한 진취적이고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여성인 나이팅게일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신화화는 지금도 여전히 강화되고 있다. 그렇게 당연한 이야기가 되어 우리들에게는 여성과 전쟁 사이에는 간접적인 관계나 수동적인 관계 밖에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기껏해야 여성은 아이들과 함께 전쟁의 가장 비참한 피해자임을 고발할 뿐이다.

     

    기득권자들인 남성은 그렇게 언론, 교육, 문화, 정치 등을 이용하여 사회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주류적인 인식을 만들어 낸다. 자연스러운 신화화가 아닌 의도되고 편향된 신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조정래의 <한강>을 보면서 기억 저 구석에 처박혀 있는, 대학 때의 강의를 억지로 끄집어 내어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읽어내려고 인상을 쓰면서 이런 복잡한 생각까지 하게 된 이유는 바로 어떻게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몇몇 구절들 때문이었다.

     

    '지금은 성장의 시기이다. 국가 경제가 좀 더 큰 규모가 되어야 한다. 아직 분배의 시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근로자들은 조금 더 참고 기다리며 견뎌야 한다. 우리는 조금씩 더 잘 살고 있다.'

    '지금처럼 경기가 좋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금 상태가 최악의 불경기이다. 그래서 결재가 힘들다. 급여가 좀 밀렸다. 그러므로 이해하고 참고 기다리며 견뎌 달라.'

    '근로자들이 노조를 만들어서 활동하는 것은 빨갱이들(?)의 짓과 다름 없다. 집회를 하고 데모를 하는 것은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사고(?)를 치면 외국에서 대한민국을 믿지 않고, 외국 자본이 대한민국을 외면해서 악영향을 준다. 그래서 정부도 경찰을 동원해서 막고 있다. 그러니 회사 방침에 말없이 따라라.'

    '박 대통령이 경제정책을 밀어 붙이면서 그나마 이렇게 국가 경제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경제 대통령이다.'

     

    이런 식의 논리는 지금도 여전히 신문 사설에서, 정치가들의 연설에서, 사업가들의 입장 발표에서, 정부 홍보 자료에서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계속 반복되고 있는 내용이다. '~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다'라는 논리적인 형식의 이야기들은 대부분이 논리가 아닌 신화이다.

    하나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다양한 요인들이 다양한 농도로 영향을 주는 원인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하면 논문이 되고, 논란의 여지가 된다. 즉 간단하고 명료한 하나의 답이 되지 못하게 되고, 인간은 여전히 그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한 수고를 감수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러한 수고는 지식인의 몫으로 남겨 둘 뿐이다. 정치가나 사업가들의 입장 보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하는 언론이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도 많다. 거꾸로 신화화를 강화하는 역할을 할 때가 많다. 누구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게끔 현실을 교묘하게 규정하고, 그것의 원인과 이유를 그럴 듯 하게 엮어서 하나의 신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도 언론이 가질 수 있는 공정성, 객관성 등등을 엮어서 말이다.

     

    <한강>은 그래서 다른 신화를 쓴다.

    힘을 가진 자들이 만든 역사에 가려서 그 이외의 다른 시각으로 주변의 다수의 이야기들을 접할 수 없는 일반인들에게 더욱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전해주는 것이다.

    너무나 자주 들었기 때문에 의문을 품지 못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이야기들에 대한 진실한 반성을 요구하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 이야기들을 전해주는 것이다.

     

    진실된 이야기들이 사람들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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