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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와 신앙, 문화와 개인
    WrItInG/ReLiGiOn 2010. 4. 5. 18:21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감성적 동물이다.
    하지만 이 두가지로만 인간은 모두 설명할 수 없다.

    7~80년대의 교육은 초등학교 때부터 IQ로 대변되는 '지성'의 교육이었다.
    90년대 부터는 지성만으로 인간을 판단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것을 깨닫고는 EQ로 대변되는 '감성'이 추가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지성'에 '감성'을 더한다고 해서 한 인간의 능력이나 인성을 판단하는 게 쉬워진 것은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할 때, 기업에서는 신입사원들의 지성이나 감성을 판단하는 것으로 부족함을 느낀지는 아주 오래된 일이다.
    조직친화력이나 인간관계, 창의성이나 독창성 등등 다른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그것을 반증한다.

    결국 종합적인 인성에 대해 말하기 위해선 '영성'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영성'이란 특정 종교의 언어도 아니고, 특정 종교의 신앙의 정도나 수행 정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지성'이나 '감성'과 같이 가장 보편적이고 중성적인 의미이다.

    이러한 '영성'은 가치관이나 인생관으로 표현될 수도 있겠고, 사람의 됨됨이나 성격, 성향 등등으로 표현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것은 '지성'이나 '감성'의 범주에 들어가기 힘든 것들이다.
    결국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본연의 구성요소 중 하나에 속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젠 '영성'의 시대가 올 것인가?
    사실 '지성'과 '감성' 그리고 '영성'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지금까지 계속 인간의 근본요소로서 인간사를 꿰뚫고 있다.

    '지성'은 학문이나 지식, 언어와 같은 것들로 표현되었고,
    '감성'은 예술이나 음악, 미술과 같은 것들로 표현되었다.
    '영성'은 종교나 문화와 같은 것들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것들이 없었던 인간 역사가 존재했던가?

    물론 '종교'가 '영성'의 표현되는 유일한 통로도 아니고, '영성'을 다 담을 수 있는 그릇도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성'이 가장 차별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종교'를 들 수 있다.

    한 개인의 지성과 감성이 다른 사람이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없는 아주 개인적인 범주인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란 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개인적인 것 중에 하나이다.
    물론 나이가 어릴수록 가족이나 친지 공동체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춘기가 지나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우를 받기 시작할 때쯤이면,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물론 그러한 고민이 지속적이거나 심각하게 진행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누가 특정 종교의 신앙을 가지라고 옆에서 아무리 권고하고 추천하고 설득하고 전도해도,
    어떻게 교회나 성당이나 절이나 다른 종교기관에 정기적으로 출석을 하거나 특별한 날에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하거나 개인적으로 자신의 종교가 무엇이라고 남에게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사람의 종교가 무엇인지는 그 사람만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이다.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이나 말을 통해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행동이나 말은 예의상 가장하거나,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여러가지 이유로 거짓으로 꾸밀 수 있다.
    하지만 종교의 범주를 넘어선 '신앙'의 범주에서는 스스로 기만하고 속이지 않는 이상 그 사람만이 고유하게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종교나 신앙은 가장 개인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종교 내부적으로 존재하는 교리나 경전, 사찰이나 교회, 성당과 같은 건축물들, 그리고 성직자나 종교인들의 단체와 같은 것은 모두 공개되어 있는 종교적인 것들이며, 문화적인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의 뿌리와 근원은 모두 '영성'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것으로만 남아있지 않는다.
    종교인이나 신앙인들도 여전히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는 것도 문제를 단순하게 남아있게 하지 않는다.

    그래도 일반인들의 생각 속에는 종교란 세속적인 것을 어느 정도 초월하며, 그래서 정치나 경제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것을 거북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종교가 초월적인 것으로 세속적인 것과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다.

    고아나 과부, 장애우나 홈리스와 같은 소외계층에 대해 종교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외계층은 일반적으로 경제적 소외계층이기 때문에 경제문제와 무관하다는 것은 좀 지나친 생각이다.

    주변 사회적인 요소들과 상관없이 종교 내부적인 성장이나 세력 과시를 위해 건물을 크게 짓거나, 성직을 세습하거나 하는 것들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도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문제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정치와도 무관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결탁한 경우는 수없이 많다.

    또한 생명이나 환경과 같은 분야에 관심을 두는 것에 대해서도 특별히 토를 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윤리성을 강조하는 종교일수록 이러한 문제에 더욱 적극적이며, 특히 지식계층들은 일반적으로 윤리적인 종교에 호감을 더욱 가진다. 우리나라는 교육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지식계층의 폭이 두터워져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하게 한다.


    이렇게 경제, 정치, 사회, 문화적인 요소와 무관하게만 있을 수 없는 종교는 가끔씩 어처구니 없는 방법으로 다른 세력에 의해 이용되기도 한다.
    특히 세계적으로 종교인 비율이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도 그러하다.

    하지만 아래의 기사는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느낌이다.


    사회단체나 시민단체에는 분명히 진보적인 것들이 있을 수 있고, 보수적인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종교계가 본질상 보수적인 측면이 강하긴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표출될 때에는 방식이 그 사회의 특성상 진보적인 것도 있고, 보수적인 것도 있다.

    하지만 종교 단체도 아니고 종교인들도 아닌 그 누군가가
    우리나라의 유력한 신문지상에
    너무도 당당하게 '자기만의 주장들을' 자신들과는 관련이 없는 이름을 만들어서는
    사람들을 기만하고 잘못된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 누군가는 누구이며,
    그 누군가가 지불한 광고비는 누구이며,
    광고비를 받았으니 사실유무와는 관계없이 광고를 하는 신문들은 누구이며,
    그 광고를 인용해서 사람들에게 또다른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이들은 누구이며,
    그것을 통해 이득을 얻고자 하는 이들은 누구이며,
    그것을 통해 가슴이 찢어지는 이들은 누구인가?

    명백한 것은 이러한 것들을 통해 가슴이 찢어지는 이들은 무고한 종교인들이다.

    너무 답답해서 주저리주저리 혼자만의 생각을 쏟아놓고 말았다.

    아무리 깊은 한숨을 내쉬어도
    깊이 가라앉은 상처를 꺼집어 낼 수가 없다.
    그러니 치유는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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