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강준만 교수(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따라해보기 _01
    WrItInG/ReLiGiOn 2014. 10. 17. 15:36

     


    이 기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모(50,여)" 씨의 이야기이다. 

    당시 백일기도를 드리고 있던, 두 딸의 어머니. 

    판사가 꿈이며,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고, 장학금을 엄마 보약값으로 내놓은 
    작은 딸은 정말 남부럽지 않게 인재로 만들어 놨다는 어머니는 
    자신은 한국 사회에서 동정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미국 유학(의과) 중인 큰 딸, 60평 아파트 거주, 영문학 전공, 입시학원 원장, 시의원 친구.. 
    이런 것들을 말하며. 

    이 기사를 읽고는 5개월이 지났다. 
    세월호의 아픔은 조금씩 체념과 망각 속으로 가라 앉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사이 많은 해프닝과 말들이 있었고, 그 중에 몇몇 목사들의 망언도 있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대한 동정, 안전에 대한 불안, 국가 사회 시스템에 대한 공분, 
    피해자 및 유가족 보상에 대한 피해의식, 약자에 대한 조롱, 만연된 불신의 확대 재생산과 악용... 
    이런 감정적인 요소들로 얼룩진 한국 사회는 이미 있는 더러운 얼룩들 중의 하나로 받아들이며, 체념하고 있다. 

    그 와중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말이 계속 맴돌면서 나의 눈과 귀를 괴롭게 한다. 
    '부'와 '명예', 그리고 '종교적 활동'이 한 데 묶인 한국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는 
    확실히 한국 개신교 교회의 '복'을 대변한다.  

    1) 부 - 우리가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게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한국은 자본주의사회를 넘어선 자본제일사회이다. 
    교환의 목적으로 교환물의 가치를 값으로 매기고, 그 값을 표시하고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돈'은 
    모든 가치들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을 넘어서, 가치 자체가 되었고, 가장 가치있는 것이 되었다. 

    의식주와 생활의 풍요로움은 이미 '얼마짜리'로 평가된다. 
    정신적 풍요, 감정적 풍요, 지적 풍요, 윤리적 풍요, 종교적 풍요 또한 '얼마짜리'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비싼 것이 풍요로운 것이 되었다.

    얼마나 비싸게(많이 소비하고) 사는지가 풍요의 측도가 되었다. 
    옷을 가득 채운 방이 없어도, 맛있는 것을 토할 정도로 많이 먹지 않아도, 대궐같은 집에 살지 않아도, 
    명품을 입어야, 비싼 고급음식을 먹어야, 땅값 비싼 동네에 살아야 풍요로운 삶이 된다.  
    양이 아니라 질이 문제라고 한다. 
    절대빈곤의 문제가 남아 있을 땐, 많이 가지고자 하나, 그 문제가 없어지면, 이젠 질을 따진다. 

    기독교의 입장에선 이는 광야의 만나와 메추라기 문제(민수기 11장)를 넘어선 패악이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회는 물질의 축복을 이야기한다. 
    물론 예수가 직접 가르친 기도에도 "일용할 양식(our daily bread)"이 빠트리지 않고 언급된다. 
    그렇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생활은 이미 빈곤층의 대명사이고, 빈곤은 극복하고 타파해야 하는 저주가 되었다. 

    중산층의 종교가 된 한국 개신교회는 중국 등소평의 '선부론(先富論)'을 믿는지도 모른다. 
    넘치도록 많이 가지면 없는 자들에게 함께 나눠서 전체적으로 부유하게 된다는 건 이미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에서도 실패하고 있다. 
    시장주의자들의 트리클 다운 이론도 심화되는 양극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옛말은 정말 옛날 말이 되었다. 

    풍요한 건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는 것이고, 이것이 축복이라고 말하지만, 하루치 이상의 '만나'는 썩는다. 그리고 한국 개신교회도 필연적이지만 안타깝게도 역겨운 썩는 냄새와 함께 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썩는 냄새를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 

    교회 내부에서나 학계에서 한국 개신교회의 기복신앙을 비판하고 자성하는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있었다. 그런 목소리들은 한국 개신교회가 부유해질수록, 풍요를 강조하고 당연시할수록 더 커져야 정상이지만, 현실은 비정상이다.

     

    2) 명예 - 개신교회는, 개신교인은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큰 역할을 해왔고, 하고 있다.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 또한 경제적인 잣대로, 즉 돈으로 환산된 숫자로 그 가치가 평가된다.

    돈을 안정적으로 많이 버는 위치에 있는 것이 곧 사회적인 지위가 된다.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이 있는 것도, 인기 있는 것도, 높은 관직이나 직급에 있는 것도 모두 돈을 못 번다는 조건이 붙는다고 한다면, 
    별달리 명예롭지 못하거나, 최소한 대중적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한국 개신교회 내부적으로도 그러한 것 같다. 
    교인수도 얼마 되지 않고, 예배당 건물도 소유하지 않고, 헌금 규모나 예산 규모도 얼마되지 않는 교회가 신도들에게부터 외면당하고, 목사도 선호하지 않으며, 교계에서도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 듯 하다. 

    대외적으로는 더욱 심각할 수 있다.  
    미국 또는 영어권에서 목사의 사회적인 명칭 중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Rev. (Reverend) 이다. 
    동사형과 명사형의 뜻은 숭배(하다, 받다)이다. 어원적으로는 숭배받을 만한 사람이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으로 분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목사들이 그 이름 때문에 일반적으로 숭배받고 존경받는 사람들인가 반문해 보자. 
    교회 안에서도 자신의 교회 목사에 대해서는 이러한 태도가 당연시 되고 있다 하더라도, 다른 교회나 교단의 목사들에게도 동일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우리나라는1925년부터 5년에 한번씩 인구주택총조사를 실시한다. 
    종교 부문은 1985년도에 신설되어 10년 주기로 항목이 포함되며, 이에 1985년, 1995년, 2005년 통계 자료가 있다. 
     

    (출처 : 통계청)


    각 종교계의 자료가 아니라, 국가에서 각 가구마다 전수 조사하는 것이라 상대적으로 가장 객관적이고 신뢰도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료를 보면 1985년에서 1995년 사이 우리나라 인구수는 약 10.2% 증가했지만, 종교인구수는 약 31.4% 증가했다. 바야흐로 과학의 시대로, 기술의 시대로 급격하게 전환하는 시기에 종교인 수가 총인구 증가률보다 3배이상 높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백분율이 아닌 절대수로 보더라도 인구는 약 413만명이 증가했으나, 종교인수는 539만명이 증가했다. 
    하여튼, 불교(28.1%, 226만명 증가), 개신교(35.0%, 227만명 증가), 천주교(58.2%, 109만명 증가) 모두 폭발적인 성장을 했던 시기이다. 
    한국 개신교회에서 말하는 부흥은 개신교만의 특별한 양적 성장이라기 보다는, 한국 사회 전체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인들이 잘 해서 경제가 급성장 했다고 하기 어렵고, 세계적으로 시대적으로 구조적으로 한국 경제가 급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개신교회 또한 목사들과 기존 신도들이 열심히 해서 교회를 성장시켰다고 볼 수 없다. 

    1995년에서 다시 10년이 지난 2005년도 자료를 보면 분명 다른 모습이다. 

    총인구는 5.6%(249만명)증가했지만, 불교 종교인수는 3.9%(41만명) 증가에 그쳤다. 
    다른 요인들을 잠시 제외하고, 단순히 특정 종교가구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그대로 그 종교에 귀의한다고 하더라도 종교인수는 평균 5.6% 증가해야 한다.  이를 자연증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그 자연증가분(5.6% 경우 약 58만명)을 밑돌고 있다. 

    폭발적인 급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종교는 천주교가 있다. 
    직전 10년에 비해 더 높은 증가율인 74.4%는 총인구 증가율 보다 무려 13.3배 높은 증가율이다. 절대수가 약 220만명으로 1995년에서 2005년 사이 증가한 총인구수 249만명과 거의 비슷하다. 

    이에 비해 천주교와 함께 기독교로 분류될 수 있는 개신교는 다른 주요 종교와는 달리 절대수가 감소했다. 
    마이너스 성장율(-1.6%)로 10년 동안 약 14만명이 순감소했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개신교 내부에서도 성장률이 자연증가분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현실은 그 우려보다 더욱 심각했다고 볼 수 있다. 

    교세를 운운하고, 종교간에 비교하자는 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사회에서 한국 개신교회는 버림받고 있다. 
    원인이나 이유에 대한 분석과 의견은 분분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 개신교회가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신학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수를 지향하는 고차원적인 종교인 생활의 조건(철저한 금욕주의, 근본주의, 엄격한 종교생활 등)을 강조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향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로부터 외면 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부와 명예라는 축복은 더이상 한국 개신교회의 복이 아니라 독이 되고 있는 듯 하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다시 종교 항목이 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사뭇 궁금하다. 

    3) 종교생활, 신앙생활 - 교회의 각종 예배와 활동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고,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렇다면 백일기도와 같은 종교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한국 개신교회에서 소위 '교회봉사'라고 하는 종교적 활동은 교회 자체를 유지, 확장, 치장하기 위한 활동일 뿐이지만, 개인적인 신앙이나 이웃에 대한 헌신과 같은 종교적 활동보다 강조되며, 점점 유일한 종교적 활동으로 전락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개인의 심리적, 정신적 문제는 심리상담사, 정신신경과 의사, 유명 강사에게 넘어 갔고, 이웃에 대한 헌신은 NGO, 시민단체 등의 일이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개인적인 기도, 묵상, 예배 등은 점점 교회와는 상관없는, 말 그대로 개인적이고 사적인 활동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자식을 잃은 어미와 아비와 함께 하면서 함께 아파하고 위로하고 지원하는 진정한 이웃사랑의 실천과 종교적인 의무 이행도 사적인 활동이 되었다. 

    결국 껍데기는 화려하나, 속은 점점 비어가고 썩어가는 모습이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회에 남아서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축복 받은 것을 인정받는 사람들은 "독실한 기독교 교인"이 되는 것인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을 더욱 가치있게 여기는 것은 전세계 공통적인 전통이었다. 
    priceless, 즉 '값이 없는, 가격을 따질 수 없는' 것은 '대단히 가치있고, 귀중한' 것이다.  

    자녀의 몸값을 따지는 부모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대한민국을 떠나고자 한다. 

    신앙의 값을 따지는 신앙인은 없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 개신교회를 떠나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댓글

Designed by Tistory.